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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남일보

박재성 칼럼(51) 훈민정음해례본의 정인지 서문은 진실일까?‘

이금로 대표기자 | 기사입력 2024/11/16 [07:41]

박재성 칼럼(51) 훈민정음해례본의 정인지 서문은 진실일까?‘

이금로 대표기자 | 입력 : 2024/11/16 [07:41]

▲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재성    

 

정인지 서문훈민정음해례를 집필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글로 시작하면서 한자와 신라 때 설총이 만들었다는 이두 사용의 불편함을 지적하고, 전하께서 계해년(1443) 겨울에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게 된 동기와 필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의 특징과 장점 등에 관하여 간략하게 설명한 뒤에 세종대왕의 뛰어난 업적을 찬양한 글인데, 집필에 참여한 최항,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강희안, 이개, 이선로를 대표해 그 우두머리인 정인지가 작성했기 때문에 정인지 서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용 중 智者不終朝而會 愚者可浹旬而學(지자불종조이회 우자가협순이학)’ ,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자라도 가히 두루 미쳐서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라는 내용은 진실이었을까 아니면 허풍이었을까 궁금증을 떨쳐낼 수 없다.

 

왜냐면 수많은 한글 교육 계획표를 살펴보면 짧게는 몇 주나 몇 달이 보통이고, 길게는 일 년이 넘도록 한글 학습을 진행할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에서도 60차시 정도를 한글 학습에 쏟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상당수 아이가 한글 익히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통계를 보면서 위에 인용한 정인지 서문의 표현을 대할 때마다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위 표현이 사실이라면 세종 시대의 사람들 특히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는 어리석은 자들보다 현대의 유아들이 더 어리석어진 것인지 의문은 꼬리를 문다. 더욱이 세종 시대에는 스물여덟 자의 글자이고 현재는 네 글자나 줄어든 스물넉 자로 배우는 양으로 따져보아도 약 15%의 점수를 선점하는 상황임을 참작하였을 때 현대의 유아들이 훨씬 유리한 학습 상황일 터인데 훈민정음 창제로부터 580년의 시공을 뛰어넘은 2024년 현재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아마도 소리에 대한 민감성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까닭은 세종이 창제한 문자의 이름 훈민정음에서도 바른 소리라는 뜻의 정음(正音)’이기 때문이다. 이란 음성 기호로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행위로 말을 통해서 나오는 소리라고 정의되듯이 중세 사람들은 음악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 이유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소리로서, 아무 때나 들을 수 없는 희귀한 소리로서의 음악이었기 때문인 데 반해 현대인은 음악을 아무 때고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고대로부터 중세까지 당시 사람들에게 음악은 악사들이 연주하는 현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소리였다. 그래서 고대 중세인들이 음악을 듣고 느꼈을 감동은 현대인이 스트리밍 서비스로 느끼는 감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차이가 컸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세종은 절대음감의 소유자였고, 직접 작곡까지 한 작곡가였다. 그 단서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찾을 수 있다. 용비어천가는 세종 27(1445)에 권제와 정인지, 안지 등에게 편찬케 하여 세종 29(1447)에 발간된 악장·서사시다. ‘(임금)이 날아올라 하늘을 다스린다.’라는 뜻인 용비어천가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훈민정음을 시험하기 위해 훈민정음으로 쓰인 가사에 직접 가락을 붙인 현존하는 최초의 책이자 훈민정음 반포 이전에 지은 유일한 훈민정음 시 작품이다.

 

이런 일화도 있다. 박연이 편경을 제작해서 시연할 때 세종은 소리가 약간 높은 것 같다라고 지적하여 확인해 보니, 재단할 때 그었던 먹줄 두께만큼 편경을 갈지 않은 것이 밝혀졌다.

 

미처 갈지 않은 편경의 먹줄 두께는 약 0.5mm인데, 이 두께가 내는 음 차이는 한 음의 20분의 1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정간보라는 악보를 창안하고 작곡도 직접 한 음악가이기도 했던 세종은 이처럼 소리에 예민했기에 백성들의 말소리 또한 면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하여 창제한 소리가 보이는 문자를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품어 훈민정음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렇듯 훈민정음은 인간의 소리를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문자로 구현하였다는 사실을 정인지는 서문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훈민정음 글자 모양은 모두 소리와 깊은 관계가 있을 정도로 세종 시대 사람들은 소리에 무척 민감했을 것이다.

 

당시 백성들은 인위적인 소리라고는 사람 말소리 외에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필기구도 귀하여 양반들의 전유물이었을 것이고, 쉽게 구할 수 없었던 백성들은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글씨를 쓰기도 했을 터지만 먼저 쓰기보다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새로 만든 스물여덟 글자 훈민정음을 배웠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소리에 먼저 반응하며 배웠기에 전하가 친히 창제하신 훈민정음스물여덟 글자는 어리석은 자도 열흘이면 깨우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강조했나 보다.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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