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其字倣古篆分爲初中終聲合之然後乃成字凡于文字及本國俚語皆可得而書字雖簡要轉換無窮是謂訓民正音
위 문장은 《세종실록 102권》세종 25년 12월 30일 기사로 글자 수가 57자로 쓰여있지만, 다음과 같은 여러 사실을 담고 있다.
첫째, 是月 - 이달에 만들었다는 것은 1443년 음력 12월에 만들었다는 때를 알리고 있다.
둘째, 上 - 임금[上:임금 상]인 세종이 지었다고 창제자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셋째, 親制 - 임금이 ‘친히’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만약 임금이 직접 창제하지도 않았다면 사관들이 아부하느라 기록했을 리는 만무한데도 훈민정음은 세종이 친히 만들지 않았다는 등의 온갖 허구가 아직도 난무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넷째, 諺文 - 『표준국어대사전』 혹은 『중학생을 위한 국어 용어사전』의 풀이처럼 “‘한글’을 속되게 이르던 말”이거나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고 나서 한글은 저급한 것으로 평민이나 상민, 부녀자들이 쓰는 언어이고, 양반이나 선비들은 한자를 사용한다고 하여 우리말‘훈민정음’을 ‘언문’이라고 낮추어 칭하였다.”라면 당시 이른바 식자층인 사관들이 훈민정음을 탐탁지 않게 여겼을지라도 임금이 친제한 문자를 감히 비하하는 의미로 적었을 리 없을 뿐만 아니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세종 26년 2월 20일에 올린 상소문에서도 22회나 언문이라고 칭하였는데, 이 또한 훈민정음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諺의‘상말’이란 새김을 ‘점잖지 못하고 상스러운 말’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 듯한데, ‘常말’은 ‘항간에서 백성들이 쓰는 일상의 말’이고 ‘언문’이란‘백성들이 평상시 쓰는 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라는 뜻이다.’
다섯째, 二十八字 - 스물여덟자라고 훈민정음의 글자 수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잃어버린 네 글자를 다시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는 한글이고 글자 수는 스물넉 자라고 가르치고 있는 현실이다.
여섯째, 其字倣古篆 -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모방했다는 이 구절 때문에 한자의 전서체나 범자 혹은 파스파 문자 등을 모방했다는 갖가지 근거 없는 추론만 난무하고 있다.
일곱째, 分爲初中終聲合之然後乃成字 - 훈민정음은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졌는데 다시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게 된다는 사용 핵심 원리까지 설명하고 있다.
여덟째, 凡于文字及本國俚語皆可得而書 -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다는 내용은 『해례본』 후서의 정인지 표현을 빌리자면 계명구폐(鷄鳴狗吠)와 풍성학려(風聲鶴唳)까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는 위대한 문자라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아홉째, 字雖簡要轉換無窮 - 훈민정음의 글자 모양은 많은 획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한자에 비해서 많아야 4획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간단 요약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무진하여 어떤 글꼴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독창성을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다.
열째, 是謂訓民正音 - 임금이 친제한 언문 28자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하였으니 그 누구도 함부로 바꾸지 말라는 어명인데, 아아! 해례본의 존재조차 몰랐던 한 서생이 고쳐 부른 이름 한글에 가려서 한낱 역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이 되어버렸도다.
필자는 57자의 한자로 쓰인 이 글을 국역하면서 글자 수가 한자의 갑절인 114자로 이루어지도록 다음과 같이 문장부호를 제거하여 기록한다.
이달에임금이친히언문28자를지었는데그글자가옛전자를모방하고초성중성종성으로나누어합한 연후에야글자를이루었다무릇문자에관한것과이어에관한것을모두쓸수있고글자는비록간단하고요약하지마는전환하는것이무궁하니이것을훈민정음이라고일렀다
문장부호를 지우고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이유는 최초의 문장부호 규정이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부록으로 실려 있으므로 그 이전의 글로 표현하면 문장부호가 없게 될 뿐만 아니라 미국 선교사였던 호머 헐버트가 독립신문에서 최초로 우리말에 띄어쓰기를 적용하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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