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에 주시경 선생은 세종대왕이 만든 우리말이 ‘언문’이라 불리는 것이 안타까워 한글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 주었어요.」
이 글은 자라나는 우리의 미래 주인공들이 배우는 《초등 전 과목 어휘력 사전》에 ‘언문’이라는 항목에 실린 풀이다.
또 《중학생을 위한 국어 용어사전》에서 ‘언문’이라는 항목을 검색해 보면 「'한글'을 속되게 이르던 말」로 풀이하고 친절(?)하게 용어해설을 하기를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고 나서 한글은 저급한 것으로 평민이나 상민, 부녀자들이 쓰는 언어이고, 양반이나 선비들은 한자를 사용한다고 하여 우리말 '훈민정음'을 '언문'이라고 낮추어 칭하였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1992년에 한글학회에서 간행한 《우리말 큰사전(어문각)》에는 ‘언문(諺文)’이란 「전날에 일컫던 한글의 낮은말.」이라고 풀이하였고,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언ː문(諺文)’ 「예전에, 한글을 낮잡아 일컫던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많은 학자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을 훌륭한 문자로 칭송하기 위해서 언문을 상말쯤으로 풀이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세종대왕이 만드신 훈민정음을 양반들이 기득권을 지키려고 언문 등 경멸하는 이름으로 불렀다”라고 분개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세종실록》에 최초로 ‘언문’이라고 언급된 것은 세종 25년 12월 30일 기사이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종 26년 2월 16일 자 《세종실록》에서는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이선로, 이개, 돈녕부 주부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에 나아가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고(이하 생략)」라고 함으로써 새로 만든 〈훈민정음〉을 ‘언문’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종실록은 세종의 재위 31년 7개월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1452년(문종 2)에 왕명으로 편찬작업이 시작되어 1454년(단종 2)에 편찬작업이 완료되었는데, 선대왕의 최대 업적인 〈훈민정음〉 창제를 문종과 단종 대에 속된 글자라는 뜻으로 ‘언문’이라고 적을 리 없을 것이고, 최만리가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뢴 상소문’에도 22번이나 언급하고, 이에 대해 최만리 등을 꾸짖는 세종의 발언 중에도 세 차례나 ‘언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최만리가 감히 임금이 만드신 문자를 상말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에는 ‘언문’을 「늘 쓰는 입말의 글」이라고 풀이하는데, 「‘글말의 글자’인 한문에 상대하여 이르던 ‘입말의 글’」이라는 이 정의가 오히려 바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언문’이란 무슨 뜻일까? ‘諺’ 자의 새김 ‘상말’은 「양반 말에 대칭하는 상민 즉 신분이 천한 사람이나 쓰는 말」이 아니라, 「일상 속 대화를 적은 구어체 문장(口文)」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상말[諺]’은 「상민의 말이 아니고, 평상시 쓰는 일상의 말」인 것이다.
제발 우리의 위대한 문자 〈훈민정음〉을 자랑스럽게 보존하지는 못할망정 스스로 깎아내리는 짓은 멈추기를 바란다. 지금 당장 《표준국어대사전》을 비롯한 모든 자전에서 ‘언문’에 대한 풀이를 「훈민정음이 백성들이 사용하는 일상의 대화를 적을 수 있는 글자라는 뜻」이라고 수정하자. 그것이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 창제하여 주신 세종대왕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다.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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