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成三問, 1418년~1456년 6월 8일)은 성승과 박첨의 딸 죽산박씨의 아들로 1418년 충청도 홍주(현재의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외가에서 출생했다. 자는 근보(謹甫)이고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삼문’이라는 이름에는 설화 같은 기이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를 막 낳으려고 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라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들렸는데, 3번째 질문에서야 비로소 아이를 출산했기 때문에 ‘하늘이 세 번 물었다[三問]’ 하여 그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장남이어서 동생들도 다 ‘삼’자 돌림이 되었고 그래서 동생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과 같이 형제들 이름이 특이하다. 성삼문이 태어난 뒤 점을 보았는데 충신이라는 점괘가 나오자, 그의 할아버지 성달생은 집안 말아먹을 녀석이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1438년(세종 20)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한 이후 관직에 오른 관료 생활 초기, 그는 집현전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이때 세종대왕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이개, 최항, 김문기 등과 함께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성균관 주부로 재직 중 집현전 교리 신숙주와 함께 마침 죄를 짓고 요동에, 귀양 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기 위해 세종의 명으로 13차례나 요동을 왕래하며 그로부터 정확한 음운(音韻)과 언어 연구를 배워온 공이 가장 컸다.
귀국 후 집현전 수찬을 거쳐 직 집현전을 지냈으며, 1442년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석형, 김문기 등과 함께 한양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또한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는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학자들을 만나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 와 이를 보고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반포에 이바지하였다.
1446년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리자 이에 대한 찬시를 써서 헌정했다. 1447년 중시(重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경연 시강관이 되어 학문을 강론하였고 사간원 우사간, 집현전 부제학을 지냈다.
세종이 만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 성삼문과 박팽년 · 신숙주 · 최항 · 이개 · 김문기 등을 항상 대동하고 고문으로 삼았다. 1451년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하자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시 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 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이후 예조 참의, 동부승지, 우부승지와 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세종은 병약한 세자(문종)도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견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을 불러서 어린 원손 홍위(후일의 단종)를 부탁한다는 유지를 여러 번 남겼는데 성삼문도 김문기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유지를 받들게 되었다.
1453년(단종 1)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세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를 사살하고 집현전의 여러 학사를 포섭하기 위해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김문기 등 집현전 학사 36명과 함께 그를 집현전 관원으로서 직숙(直宿)한 공이 있다고 하여 정난공신의 책록을 주었다. 모두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으나, 성삼문, 김문기 등은 수치로 여기고 연회를 베푸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
학자의 이미지와 강직한 충신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들로서는 의외겠지만 실제 역사 속 성삼문은 평소에는 밝고 유머러스한 성격이었으며 실없는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개를 지켜야 하는 때가 오면 누구보다 굳은 의지와 절개를 보여주는 외유내강형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것은 아버지 성승은 물론이고 할아버지 성달생까지 모두 무장이었던 집안의 무인적 풍모가 성삼문의 강직한 면에 영향을 준 것 같다.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재성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경기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