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1444년 2월 28일부터 5월 17일까지 1차 청주 초수리(椒水里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초정리의 옛 지명. 탄산이 섞여 있는 탄산수로, 마을 이름인 '초정(椒井)'은 탄산수가 나는 우물이 있다고 붙은 이름이다.)에 거둥(임금의 나들이. 거동(擧動의 원말.)하고, 같은 해 윤칠월 15일부터 9월 26일까지 2차 거둥에 이르러 약 120일가량 초수리에 머물렀는데, 1445년 1월 27일 좌의정 신개 등이 초수리로 행차하길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청주 초수리에 거둥한 이유가 안질을 치료하기 위함이었다면 2차에 걸쳐 거둥한 다음 해에 좌의정 등의 요청을 거절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1444년 청주 초수리의 거둥에는 훈민정음 반포 전에 창제의 마무리를 위한 극비 작업을 위한 행보였다는 것을 ‘갑자상소문’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서 처음 언급한 사료는 세종실록 세종 25년(1443) 음력 12월 30일 기사이다. 그리고 한 달 보름 후인 1444년 2월 16일 세종은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이선로, 이개, 돈녕부 주부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언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였다. 그로부터 나흘째 되던 날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는 상소를 올리는데 그 해가 세종 26(1444)년 갑자년이므로 세간에서 ‘갑자상소문’이라고도 한다.
이 갑자상소문은 ‘集賢殿副提學崔萬理等上疏曰’로 시작된다. 즉,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여 아뢴다.’라는 것이다. 이 글에 보면 상소를 올리는 신하는 최만리 단독이 아니라, ‘최만리 등’이라고 하였다. 이 표현은 집현전 부제학이 소두(疏頭 : 연명(聯名)으로 올리는 상소에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가 되어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들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기를, (전략) 무릇 사공을 세움에는 가깝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사온데, 국가가 근래에 조치한 것이 모두 빨리 이루는 것을 힘쓰니, 두렵건 대, 정치하는 체제가 아닌가 하옵니다. 만일에 언문은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꾸는 큰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료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선갑 후경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제왕에 질정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백 세라도 성인을 기다려 의혹 됨이 없는 연후라야 이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배 10여 인으로 하여금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부회 하여 공장 수십 인을 모아 각본하여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에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특히 연사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시어 호종하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전일에 비교하오면 10에 8, 9는 줄어들었고, 계달하는 공무에 이르러도 또한 의정부에 맡기시어,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략)
위 내용은 첫째, ‘만일에 언문은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최만리 등은 일단 언문 창제를 기정사실로 하여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그렇다 하더라도 ‘풍속을 변하여 바꾸는 큰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료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지 않고 시행하려고 합니까라고 표현하면서 부제학을 비롯한 집현전 주요 학자인 자신들이 배제되었음을 서운해하고 있다. 셋째, 청주 초수리에 거둥하시어 성궁을 조섭하셔야 하는 때에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고 더욱이 흉년인데, 어찌 언문만은 행재에서 급급하고 번거롭게 하려고 하시는지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다고 상소를 올리게 된 동기를 표현하고 있듯이 갑자상소문 중에서 핵심이 들어있는 글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세종 임금은 평소 즐겨 거둥하였던 온양온천이 있는 온양 행궁으로 치유를 가지 않고 1444년 2월 28일 왕비와 함께 초수리에 거둥하여 나흘 뒤인 3월 2일 초수리에 이르렀고, 그날부터 64일째 되던 5월 7일 환궁하였는데, 얼마나 병이 위급하기에 또다시 같은 해 윤칠월 15일 초수에 거둥하여 59일째 되던 9월 26일 환궁하였을까?
공교롭게도 초수리 행궁에서 약 44km 거리에 있는 속리산 복천사에는 42세의 신미 대사가 24세 때부터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세종 임금이 안질 치료를 위해 머문 초정 행궁에서 신미 대사가 수행하고 있던 복천사까지의 거리는 일반적으로 걸어서 이동하는 말의 평균 속도 약 6~8km/h를 적용하면 약 6~7시간 거리이고, 성인이 도보로 이동하더라도 약 12시간 소요되는 거리를 참작한다면 세종 임금이 초수리 행궁으로 복천사에 있는 신미 대사를 불러들일 수 있는 거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훈민정음 창제를 오랑캐의 짓이라고 폄훼하고 숭유배불 정책을 내세운 사대모화에 젖은 유생들의 반대가 명약관화한 경복궁보다는 안질을 치유하는 표면적인 이유 외에도 최대한 자유가 보장된 환경에서 신미 대사를 불러서 조언을 구하고 문자 창제에 관한 토론이 가능했던 청주 초수리 행궁이 훈민정음 창제의 마무리 작업을 위한 장소로는 최적지였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쉽게도 이때 세종대왕이 지냈던 초정행궁은 1448년 전소되었지만, 2019년에 복원되었다.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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