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나주목에서 태어나 7세 때 아버지를 따라 한성부에 올라왔다.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이다. 아버지는 공조참판(종2품)을 지낸 신장(申檣, 1382~1433)인데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신장’의 졸기에는 그가 인품이 온후하고 사장과 초서ㆍ예서에 뛰어났지만, 술을 너무 좋아한 것이 단점이었다고 적혀 있다. 그의 능력을 아낀 세종이 절주를 당부했지만, 과음은 결국 그의 사인이 되어 신숙주 16세 되던 세종 15년 2월 8일 졸한다.
‘숙’이라는 이름이 나타내듯이, 신숙주는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 신송주(申松舟), 신말주(申末舟)로 이어지는 5형제 중 셋째였다.
신숙주는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21세 때인 1438년(세종 20) 22세의 나이로 식년시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문과에서 3등의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한 것이다. 1439년 친시 문과에 을과 3위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세종대가 끝날 때까지 그는 집현전 부수찬(종6품), 응교(정4품), 직제학(정3품)과 사헌부 장령(정4품), 집의(종3품) 등의 주요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훗날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영의정까지 지냈다. 통상적으로 조선의 관료는 1품 승진에 3년이 걸렸는데 과거 합격도 합격이고 순전히 날짜만 채워서 종9품에서 정1품까지 오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많으면 51년이다.
이 시기의 경력에서 중요한 장면은 우선 26세 때인 1443년(세종 25) 서장관으로 일본 사행에 동참한 것이었다. 서장관은 정사와 부사를 보좌하면서 사행을 기록하고 외교 문서의 작성을 맡은 중요한 직책으로, 당시의 가장 뛰어난 젊은 문관(4~6품)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상당한 정도의 신병을 무릅쓰고 출발했지만, 신숙주는 일본 본토와 대마도를 거치면서 문명을 떨치고 여러 외교 사안을 조율했다. 특히 대마도주를 설득해 세견선의 숫자를 확정한 것은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1450년(세종 32) 중국에서 예겸과 사마순이 사신으로 왔을 때 그들을 접대하면서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발휘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예겸은 자신이 지은 ‘설제등루부’에 신숙주가 걸어가면서 운을 맞춰 화답하자 “굴원과 송옥 같다”라면서 감탄했다.
이때는 성삼문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그는 신숙주보다 한 살 적었지만 문과 급제는 한 해 빨랐다. 그 뒤 전혀 다른 인생의 궤적을 밟은 두 사람이었지만, 그 경력과 나이는 매우 흡사했다.
책을 읽으려고 집현전 숙직을 도맡아서 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지독한 독서광이었으며, 소문난 수재이자 책벌레였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하루는 어느 집현전 학자가 늦게까지 책을 읽다 잠들었길래 세종이 자기 옷을 덮어 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야기의 주인공이 신숙주다. 이에 흡족해진 세종은 이후 ‘훈민정음’ 창제에도 신숙주를 투입한다. 세종은 신숙주를 높이 평가해서 아들인 문종에게 “신숙주는 크게 쓸 인물이다”라며 자주 칭찬했다고 한다.
세종 시절에는 일부러 책을 읽기 위해 남들이 꺼리는 궁궐 숙직을 도맡아 했다고 하며 이때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그만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는데 세종이 이걸 보고 본인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서 덮어 주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가 ‘필원잡기’에 수록되어 있다.
집현전 학사로서 성삼문과 함께 한자음 정리에 관한 질의를 위해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찬을 여러 번 찾아가기도 했으며 외국어에도 능통해 한어, 왜어를 비롯한 몽골어, 여진어, 유구어 등 동아시아 8개 국어를 통역 없이 구사하였으며, 각 나라말의 구조와 원리를 깨달아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준 신숙주 아끼기를 세종은 자기 몸같이 하였다. 이때 신숙주의 나이 22세였다.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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