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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남일보

박재성 칼럼(27) ‘훈민정음’과 ‘한글’도 구분 못 하는 문화재청

이금로 대표기자 | 기사입력 2024/05/18 [08:02]

박재성 칼럼(27) ‘훈민정음’과 ‘한글’도 구분 못 하는 문화재청

이금로 대표기자 | 입력 : 2024/05/18 [08:02]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지난 202339일 보도자료를 통해 훈민정음 반포의 생생한 역사, 나신걸 한글편지보물 지정이라는 제하의 보도자료를 통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했다는 소식으로 국민적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보물 나신걸 한글편지는 조선 초기 군관 나신걸(羅臣傑, 1461~1524)이 아내 신창맹씨에게 한글로 써서 보낸 편지 2장이다. 2011년 대전시 유성구 금고동에 있던 조선 시대 신창맹씨 묘안 피장자의 머리맡에서 여러 번 접힌 상태로 발견되었다. (중략)

 

편지의 제작 시기는 내용 중 1470~1498년 동안 쓰인 함경도의 옛 지명인 영안도라는 말이 보이는 점, 나신걸이 함경도에서 군관 생활을 한 시기가 1490년대라는 점을 통해 1490년대에 쓰였을 것으로 감안하면,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불과 45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지역과 하급 관리에게까지 한글이 널리 보급되었던 실상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시대에 한글이 여성 중심의 글이었다고 인식되었던 것과 달리, 하급 무관 나신걸이 유려하고 막힘없이 쓴 것을 보면, 조선 초기부터 남성들 역시 한글을 익숙하게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기존에는 조선 시대 관청에서 간행된 문헌만으로는 한글이 대중에 어느 정도까지 보급되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면, 나신걸 한글편지가 발견됨으로써 한글이 조선 백성들의 실생활 속에서 널리 쓰인 사실을 확인한 계기가 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아울러, 해당 유물은 현재까지 발견된 한글편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자료이자 상대방에 대한 호칭, 높임말 사용 등 15세기 언어생활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앞으로 조선 초기 백성들의 삶과 가정 경영의 실태, 농경문화, 여성들의 생활, 문관 복식, 국어사연구를 하는 데 있어 활발하게 활용될 가치가 충분하며, 무엇보다도 훈민정음 반포의 실상을 알려주는 언어학적 사료로서 학술적ㆍ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위 보도 내용을 보면 이 편지가 1490년대에 쓰였음을 감안하면,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불과 45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지역과 하급 관리에게까지 한글이 널리 보급되었던 실상을 알 수 있다.”라고 친절하게 부연 설명을 하고 있지만,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불과 45년이 지난 그 시대에는 한글이라는 명칭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왜냐면 세종대왕이 1443년 창제하여 1446년 반포한 훈민정음이 구한말에는 '나라의 글'이란 뜻으로 '국문(國文)'이라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인 1912년경에 주시경 선생이 저술한 <소리갈>이라는 책에서 큰 글, 하나밖에 없는 글, 대한제국의 글자라는 의미를 담았다면서 한글이라는 명칭을 처음 쓴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므로 주시경 선생은 1940년에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의 존재조차도 몰랐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을 한글이라고 한다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한 것이 아니라, 한글 24자를 창제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1490년대에 언문으로 작성된 나신걸 편지나신걸 훈민정음 편지혹은 나신걸 언문 편지라고 공식적인 문화재 명칭을 부여해야 마땅하다.

 

다른 부서도 아니고 우리의 문화재를 담당하는 문화재청이 민족의 자랑인 훈민정음과 한글의 시대에 따른 명칭 변화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는 문화재청 담당자에게 수정을 요청하는 서한을 메일로 보냈지만 아무 답변이 없다.

 

▲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재성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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