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늘 나에게 이르기를 ‘둘이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 자식은 누구를 의지하며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 없이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말해 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당신 내 배 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배 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으며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 적습니다. 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보여주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속에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이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원이 아버님께 올림 병술년(1586)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
읽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 언문 편지는 26년 전 1998년 4월 안동시 정상동 일대 발굴 사업을 진행하다 조선시대 때로 추정되는 미라와 함께 당시 복식이 묻힌 무덤이 발굴됐다.
무덤 주인은 키 180cm 정도의 건장한 남자, 이응태로 장례 당시 염습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3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이응태의 외로움을 달래 주려는 듯 무덤 안에는 미라가 된 원이 아버지의 가슴을 덮은 원이 엄마의 애절한 편지와 아우의 죽음을 애도하며 적은 추도시, 아버지와 주고받던 각종 서신, 그리고 가족의 옷가지와 미투리 등 가슴을 울리는 유물이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중 412년간 무덤 속에 있다가 우연한 기회로 빛을 보게 된 ‘원이 엄마 편지’는 잔잔하면서도 큰 울림으로 다가와 가슴을 친다. 죽은 남편을 따뜻하게 품듯 가슴을 덮고 있던 편지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나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와 같은 애틋한 구절로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신다.
시신의 주변에서 총 열여덟 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편지는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가로 58.5cm, 세로 34cm의 한지에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절절한 심정으로 빈 곳 없이 가득하게 언문으로 쓴 ‘원이 엄마 편지’는 이응태의 시신처럼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고 한다.
남편을 향한 원이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시신의 머리맡에서 발견된 ‘미투리’이다. 미투리는 보통 삼으로 만들기에 황토색을 띠는데 이응태의 묘에서 발견된 미투리는 검은색 실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검은색 실의 정체는 백여 년 전 사람의 머리카락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머리카락은 원이 엄마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미투리를 싸고 있던 한지에는 ‘내 머리 배혀’, ‘이 신 신어보지’라는 글자가 흐릿하게 남아 있으므로 남편이 낫기를 기원하며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미투리를 신어주기를 바라는 아내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결국, 남편은 그 신을 신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리고 ‘원이 엄마 편지’ 속에는 ‘자내’라는 단어가 총 14번 등장하여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놀랍게 한다. 그것은 원이 엄마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으로 ‘자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16세기 조선시대, 남편과 아내의 사이가 서로를 ‘자내’라고 부를 정도로 평등했던 것일까? 아니면 원이 엄마가 틀을 깨고 쓴 것일까? 사실 ‘자내’라는 단어는 현재 아랫사람에게 쓰는 호칭(자네)으로 바뀌었지만, 임진왜란 전까지는 상대를 높이거나 적어도 동등하게 대우해 부르는 호칭이었다. 이 편지로 과거의 ‘자내’와 현대의 ‘자네’는 다르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 후 143년 되는 선조 19년 병술년에 쓴 ‘원이 엄마 편지’는 400여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어 남편을 향한 아내의 애절한 사랑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잊어가는 우리에게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다.
만약,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남겨주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애틋한 사랑을 한문으로 어떻게 표현했을까 생각만 해봐도 절레절레 고개가 저어진다.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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