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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남일보

박재성 칼럼(37) 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세 번째 조력자 정인지

이금로 대표기자 | 기사입력 2024/08/04 [17:04]

박재성 칼럼(37) 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세 번째 조력자 정인지

이금로 대표기자 | 입력 : 2024/08/04 [17:04]

정인지(鄭麟趾)는 석성 현감(현재의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을 지낸 정흥인(鄭興仁)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가 얼마나 총명했는지 기록에 의하면 5세 때 이미 글을 깨쳐 서책에 눈길만 스쳐도 줄줄 외울 수 있었고 1번만 보면 읽고 쓸 줄 알아 천재라는 소문이 이웃에 자자하였다고 한다.

 

고전을 암송하고 작문에도 재능을 보였는데 7살에 소학을 깨우쳤고 13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선비들 앞에서 강론함으로써 이미 그의 이름은 천하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1411(태종 11) 식년시 생원시에 급제했고 1414(태종 14) 식년시 문과에 응시했는데 을과 11위의 장원으로 결정된 후 예빈시주부에 임명되었다.

 

이후 사헌부 감찰, 예조 좌랑, 병조 좌랑 등의 관직을 거쳤는데 행정 미숙이나 일 처리를 잘못해서 의금부에 투옥되기도 했고 비상 동원 훈련 중에 술을 먹는 짓 등 부적절한 행동으로 탄핵을 당한 경력도 있다.

 

정인지가 투옥되거나 벌을 받는 기록을 보면 그 원인은 주로 도장을 잘못 찍거나 의례에 필요한 의장을 빼먹는 이유가 대부분이다. 병조 좌랑 때는 의장을 빼먹은 죄로 태형 40대까지 맞은 기록도 보인다. 이런 것을 보면 똑똑하면서도 덜렁대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세종이 즉위할 즈음 관직 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는데 상왕으로 있던 태종도 세종에게 "크게 쓸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 후 예조판서,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등의 여러 요직을 거치며 천문, 역법 사업에 뛰어들어 세종 시대 과학 발전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천문과 산술에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혼천의(천체관측 기구)와 앙부일구(해시계) 등의 기기를 정초와 함께 설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에도 조예가 깊어 자치통감훈의 편찬이나 김종서 등과 함께 고려사등의 편찬을 맡기도 했다. 김종서가 계유정난으로 역신으로 전락했으므로 현재 고려사세종실록은 모두 편찬 주관자 명의가 정인지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의 보급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훈민정음의 공식 설명서인 해례본의 서문을 쓰고 해례본 편찬과 용비어천가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도 바로 정인지다. ‘훈민정음의 광범위한 보급은 물론이고 창제 원리에 관한 서술을 담은 해례본의 서문을 정인지에게 손수 맡겼다는 사실은 세종이 정인지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은 생전에 정인지를 깊이 신뢰해 그에게 자신의 실록인 세종실록편찬을 직접 수행하도록 하였다. 자신의 실록을 맡겼다는 것은 그의 능력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를 깊이 신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훈민정음해례본서문은 내용 측면에서 심오한 철학이 깃들여 있고 형식 측면에서 빼어난 비유와 함께 쉽고 정갈한 문장으로 쓰여 있어 명문으로 손꼽히는데, 마지막 문장 정통 11(1446) 9월 상한, 자헌대부· 예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춘추관사· 세자우빈객, 신 정인지는 두 손 모아 절하고 머리 조아려 삼가 씀.”이라는 글에서 음력 9월 상한(음력 910)을 양력으로 바꾸면 109일이 되므로 한글날로 제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세종 시대의 과학뿐 아니라 역사학 및 문화 발전 전반에 막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서 세종을 칭송하는 등 군신 간의 관계는 좋았음을 미루어보면 다. 정인지는 세종보다 겨우 1살이 더 많은 친구나 다름없는 연령대라 임금과 신하라는 위치를 떼고 보면 세종대의 내로라하는 인재 중에서 가장 마음이 잘 맞았을지도 모른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였던가! 정인지는 이와 같은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어린 단종의 보위를 부탁한 세종의 유명을 외면하고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왕위 찬탈에 가담한 전력 때문에 세조 말기에 조정에 나온 사림파로부터 경원시 당했다.

 

▲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재성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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