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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남일보

‘광화문 복합상소’는 광화문광장 민중 집회의 원조

20일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걷기 대회 열려

경기남일보 | 기사입력 2024/04/24 [22:40]

‘광화문 복합상소’는 광화문광장 민중 집회의 원조

20일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걷기 대회 열려
경기남일보 | 입력 : 2024/04/24 [22:40]

 

 

▲ 20일 광화문 기념 행사 . (사진/채길순 이사장 제공)    

 

‘18932월 광화문복합 상소 기념제가 지난 2011시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이사장 채길순) 주최로 광화문 현장에서 열렸다.

 

광화문의 역사적 유래와 광화문 복합상소 내용에 대한 설명에 이어 정동 괘서 사건의 현장을 답사하는 행사로 진행됐다.

 

채길순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1893년 광화문 복합상소는 오늘날 광화문광장이 민중의 목소리 표출하는 시작점이라면서 광화문광장이 민의를 표출하는 전통적이고 상징적인 장소가 된 행사라고 사건의 의미를 부여했다.

 

해설에 나선 박길수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현재 광화문광장의 의미와 육조거리가 지닌 장소 설명에 나섰다. 당시 육조거리였던 광화문광장은 의정부와 이, , , , , 공조 등 육조(六曹)의 주요 관아가 위치했으며, 조선왕조의 정치 1번지였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때 피해를 본 육조거리는 19세기 말 흥선대원군 때 재건해 해태(해치, 시비와 선악을 판단한다는 상상의 동물 해태가 있어서 붙은 이름) 상을 중심으로 개화기 외국인들은 내각의 길, Cabinet Street)’로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시대 이름인 육조라는 말을 없애기 위해 광화문통이라고 이름을 변경했다. 해방 후, 미 군정기에는 군정청이 입주 후 군정청 광장으로 불렸다. 대한민국이 들어서면서 세종로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20097월 광화문광장으로 불렸다.

 

광화문 앞은 조선시대 최고 지성이자 개혁파의 거두였던 조광조를 비롯한 1천여 명의 성균관 유생들이 엎드려 상소하던 곳이었으며, 조선 후기 최익현이 죽기를 각오하고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요구하며 지부상소(持斧上疏, 상소의 내용이 왕의 비위를 거슬러 도끼로 목을 베이는 형을 각오한다는 뜻)’를 올렸던 곳이다.

 

언로(言路)에 있어서 이미 선진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조선 정치문화의 핵심이 바로 상소 제도였던 것이다. 그 상소의 소통 장소가 바로 광화문 앞이었다.

 

그 이후 민주화 시위 때나 촛불집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가 열리면서, 여전히 전통적으로 국가 권력과 민중 권력이 맞부딪치거나, 만나는 장소가 됐다.

 

이에 따라 광화문 네거리 일대에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최초로 관군을 물리쳤던 황토현전투를 상징하는 황토마루(황토현)’가 존재한다.

 

광화문 복합상소의 전개 과정과 영향 설명에 나선 해설자는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적극적인 동학 창조주 수운 최제우의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고, 189210월 공주 교조신원운동, 189211월 삼례 교조신원운동을 진행하면서 18932월 광화문 앞 교조신원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 광화문 복합상소는 보은 취회로 이어진다.

 

당시 광화문 복합상소의 소두는 손천민으로, 상소문의 핵심 내용은 동학이 사교가 아니라는 소명과 함께 수운 선생의 신원을 해달라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상소 팀은 소수(疎首) 박광호 외 40명과 지원팀 30여 명으로 구성됐다.

 

189328일에 상경해 11일 경복궁 광화문 앞에 엎드려 상소를 시작했다. 그 광경은 붉은 보자기에 싼 상소문을 앞에 두고, 두루마기(周衣)를 입은 9명의 동학도인 들이 염주를 들고 주문을 외고, 그 뒤로 선비 차림의 동학도인 30여 명이 엎드려 역시 주문을 외며, 상소문을 접수해 줄 것을 간구했다.

 

이런 상소문을 시작한 지 사흘째인 13일에 사알(司謁; 궁궐에서 왕명을 전하던 정6품 잡직 관원)이 와서 격식을 갖추어야만 상소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며 상소문 접수를 거절했다. 다만, 상소의 내용을 물어다가 왕에게 전달했는데 집으로 돌아가 안업(安業)하면 소원을 들어주리라고 했다.

 

정부는 장차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해산시키는 데만 급급했다. 역시 고종의 비 답은 곧 공약(空約)이 됐고, 오히려 정부는 상소를 올린 주모자를 색출해 체포를 시도했고, 지방관들의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서울에 출현한 동학은 정부를 화들짝 놀라게 했으며, 당시 조선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이던 세계 각국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했다.

 

1892년 이후 전개된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동학교도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기득권층에게 하소연하는 방법으로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사태 해결은 전국적인 봉기를 통한 민 씨 정권의 타도와 외국 세력의 축출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

 

동학 지도부는 복합상소를 중지하고 곧장 해산 후, 도소가 있는 충청도로 내려갔다. 18933, 2만여 명의 교도가 모인 가운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정치적 기치를 내건 보은 취회가 열려 동학농민혁명의 길을 향한 행사가 진행됐다.

 

▲ 자료 사진. 채길순 이사장 제공    

 

척왜양창의 격문 게시 운동 사적지

 

복합상소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이미 한양에서는 동학교도들이 상경해 외국공사관 및 교회에 강경한 내용으로 외세 배격의 괘서(掛書, 지배층의 폭정과 수탈에 대한 폭로나 시정 요구 등을 벽이나 문에 몰래 써 붙이거나 걸어 놓는 글)를 붙이고 다녔다.

 

특히 광화문 복합상소 이전부터 수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외국인을 배척하고 몰아내기 위해 상경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던 상황이라 외국인들을 더욱 공포에 떨게 했다.

 

이때 동학도들이 내건 괘서(掛書)의 종류를 보면 27일 자의 괘서는 서학교도에게 경고한 것이고 224(410) 자 괘서는 일본인에게 경고한 괘서이며 218(44) 자 괘서는 서양공관에 경고한 괘서다. 동학도들이 광화문 복합상소를 계기로 반외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괘서(격문)214일에 미국인 선교사 기포드(Gifford) 학당에, 18일에는 미국인 존스(H.J.Jones)의 집 교회당에, 20일을 전후해 프랑스 공사관에 32일에는 일본인 공사관까지 총 4번 붙었다.

 

괘서(격문)의 내용은 서양의 기독교 침투와 일본의 세력 확장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담고 있다. 괘서(격문)는 익명으로 되어 있어 배후를 알기 어렵지만 동학 남접 계열의 활동으로 짐작된다.

 

광화문 복합상소 기간 중 삼례에 모여 있던 동학교도들이 전라감사에게 동학을 사도로 칭하지 말고 외국 선교사와 상인을 모두 나라 밖으로 쫓을 것이며 탐학한 지방관리를 제거하라고 요구한 데 이어 그 일부가 상경했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의 공세적인 선교활동, ·일 양국의 경제적 침탈로 인한 백성들의 반감이 팽배해 있던 분위기 속에서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비슷한 시기에 괘서 부착과 무력 항쟁으로 맞설 태세라는 저항방식이 일치하고, 괘서(격문)의 주장 내용이 척왜양의 구호 등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박맹수 교수는 2010년 전후로 새로 4종의 격문을 추가로 발굴해 소개했다. (󰡔개벽의 꿈, 동아시아를 깨우다󰡕, 2011, 모시는 사람들, 669) 이들은 동학 배척 상소를 하는 유생들에 맞서 동학의 정당성을 알리고, 동학을 배척하는 유생들에게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동학도들은 323일 남산으로 집결할 것을 공시하며, 동학도의 이름으로 일본인의 철수를 주장하는 한편 복합상소의 지속적 추진이 어려워진 지도부가 310일 서울을 철수하면서 다시 의기를 들어 적년(積年)의 숙원을 달성하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이러한 4종의 신 격문들은 기존의 격문들에 비해 동학적 입장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 있어서, 기존의 격문들을 둘러싼 주체 논쟁에서 동학 관련성의 입장을 보완해 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서울뿐 아니라 전라도 각 읍 관아, 보은 관아, 부산 성문에도 척왜양의 격문이 게시됐다. 격문게시 운동은 반외세라는, 동학혁명 당시의 깃발이 단지 구호에 그친 것이 아니라, 어떤 형식으로든 행동화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또한 격문게시 운동을 전적으로 동학도들의 활동이라고 볼 때는 동학도의 활동 영역과 방식이 그만큼 광범위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 동학 세력이 참여한 것이라고 볼 때는 동학적인 활동에 대한 일반 민중의 연대 또는 동조가 활발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경복궁 수난사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돼 270여 년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고종 1)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인 1927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경내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광화문을 해체하여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이전시켰고, 이나마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1968년에 전통적인 광화문의 모습을 상실한 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그나마 도로 확장을 위해 위치도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2006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돼 전통적인 옛 모습을 찾기 시작했으며 20108월에 완공됐다.

 

또한 일제 강점기 이래로 도로로 이용되던 육조거리(세종로)600여 년 역사를 지닌 서울의 중심거리로서 차량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전환하고, 경복궁과 북악산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 조망 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하며, 세종로의 옛 모습인 육조(六曹)거리 복원을 통한 역사·문화 체험 공간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한 사업이 2008527일 착공됐으며, 200981일 개장하여 시민에게 개방됐다.

 

특히 이때 조성된 한국사 주요 연표 박석에는 1860년 동학 천도교 창도와 1894년 동학혁명 발발 사실 및 19193.1운동 등 동학 천도교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도 함께 기록돼 있다.

 

이러한 광화문 및 광화문광장 복원 이후 시민들의 관심에서 밀려나 있던 광화문과 광화문광장은 다시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매주 주말 광화문광장에서는 각종 문화행사가 잇따라 개최되며, 특히 언로의 중심으로서의 광화문의 역사적 위상에 걸맞게 각종 정치적 사회적 의견을 개진하는 시위와 집회도 거의 매주 열리고 있다.

 

 

또한 두드러진 단체에서 광화문광장 사용 허락을 얻어 연례적인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2013103일에는 천도교 중앙총부와 ()동학민족통일회가 적극 참여한 개천절 남북 공동행사가 광화문광장에서 개최됐다.

 

2019226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제정되고, 그해 511일 이곳 광화문에서 제1회 국가기념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거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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